중동에서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면 자연스럽게 국제 유가 폭등을 예상하게 됩니다. 역사가 늘 그래왔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이스라엘이 카타르의 도하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지도부를 공격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유가는 소폭 상승에 그쳤습니다. 많은 사람이 의아해하는 이 기이한 현상 뒤에는 복잡한 경제와 지정학적 요인들이 얽혀 있습니다. 이번 사건이 왜 과거와 같은 유가 쇼크로 이어지지 않았는지, 그 원인을 하나씩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본론: 유가 변동을 결정하는 숨겨진 요인들
1.공급 과잉, 시장의 방어막 역할을 하다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핵심은 바로 글로벌 원유 시장이 현재 ‘공급 과잉’ 상태라는 점입니다. 마치 홍수가 나기 전 댐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시장에는 이미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의 원유 재고가 쌓여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산유국 협의체인 OPEC+가 최근 증산 규모를 줄이긴 했지만, 이는 시장의 넘치는 공급량을 반영한 조치에 가깝습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의 예측에 따르면 올해 세계 원유 생산량은 소비량을 하루 약 170만 배럴이나 초과할 것으로 보입니다. 시장에 물량이 넘쳐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큰 사건이 터져도 가격이 폭발적으로 치솟기는 어려운 구조입니다. 수요가 공급을 압도할 때 발생하는 공급 부족 리스크가 지금은 크지 않다는 뜻이죠. 그래서 투자자들은 공급 부족보다는 경기 둔화로 인한 수요 부족을 더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2.원유 생산 시설, 직접적인 타격은 없었다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사건이 유가에 미치는 영향은 ‘원유 생산 및 수송 인프라’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1970년대 오일 쇼크처럼 원유 생산국들이 에너지 무기화를 선언하거나, 핵심 송유관이나 정유 시설이 파괴되면 유가는 급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이스라엘의 공격은 하마스 지도부를 겨냥한 것으로, 원유를 생산하고 운송하는 시설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하마스를 지원하는 이란 역시 공급 인프라에 차질이 생겼다는 소식이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즉, 시장에선 이번 사건이 물리적인 공급 차질로 이어질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죠. 사건의 성격이 원유 시장의 안정성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한 겁니다.
3.투자자들의 ‘피로감’과 ‘학습 효과’
사람들이 같은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점차 반응이 둔해지는 것처럼, 투자자들 역시 중동의 잦은 지정학적 긴장에 익숙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리스크 프리미엄’을 가격에 즉각 반영했지만, 실질적인 공급 차질이 발생하지 않는 반복적인 패턴을 보면서 점차 학습하게 된 것입니다. CIBC 프라이빗 웰스의 수석 트레이더 레베카 바빈의 말처럼, 이제 시장은 공급에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이 없으면 굳이 리스크를 가격에 반영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른바 ‘학습된 무관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중동 사태에 대한 투자자들의 피로감이 유가 상승 폭을 제한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된 것입니다.
4.미국의 이례적인 비판, 확전 가능성을 낮추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강력하게 지지해왔던 미국의 태도가 변했다는 점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입니다. 백악관은 이번 공격에 대해 이례적으로 규탄 성명을 발표하며 “이스라엘과 미국의 목표 달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가자 전쟁이 중동 전체의 위기로 확산하는 것을 경계하는 미국의 속내를 보여줍니다. 미국의 이런 입장 변화는 다른 중동 국가들이 이스라엘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거나 에너지를 무기화하는 데 제동을 걸 수 있습니다. 특히 사우디, 카타르 등 주요 산유국들이 과거와 달리 미국과 외교적으로 가까워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1973년 제1차 오일쇼크와 같은 에너지 무기화는 현재로선 가능성이 낮아 보입니다.
5.카타르의 중재 역할, 앞으로의 향방은?
이번 공격은 가자 전쟁의 휴전 협상을 중재해온 카타르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협상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실상 논의가 중단되고 전쟁이 더욱 격화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지정학적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국제 유가는 단기적인 반등 이후 하방 압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금리와 환율, 경기 둔화에 대한 우려가 여전한 데다 계절적인 소비 감소까지 겹치면서 수요 측면에서 약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죠. EIA 역시 당분간은 공급이 소비를 앞지르는 과잉 흐름이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리스크를 압도하는 시장의 기본 원리
이번 이스라엘의 공격 사건은 국제 유가 시장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전통적으로 중동의 불안정은 곧 유가 폭등으로 이어졌지만, 이제는 단순히 사건의 발생 여부만으로 가격을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입니다. 시장은 눈앞의 사건보다 그 사건이 실질적인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거시적인 경제 상황과 수급 펀더멘털을 훨씬 더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즉, 공급 과잉이라는 근본적인 구조와 투자자들의 학습 효과, 그리고 미국의 외교적 스탠스 변화가 지정학적 리스크를 압도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중동의 정세는 복잡하게 전개되겠지만, 유가 투자를 고려하고 있다면 단순히 ‘전쟁’이라는 키워드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시장의 근본적인 수요와 공급의 흐름, 그리고 투자자들의 심리를 종합적으로 읽어내는 통찰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참고:본 글은 투자 조언이 아닌 참고용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최종 투자 판단은 투자자 본인의 책임입니다.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